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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의 규범적 특성과 현대 지식 사회 - 양신규

LIMSEUNGSOO 2021. 3. 7.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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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규범과 현대지식사회의 기반

 물리학의 인식론 방법론이 어떻게 수백년간의 장구한 "진지전"을 통해 코페르니쿠스의 동유럽 한귀퉁이에서부터, 현대에는 (과학학과 문예이론등의 Marginal 한 학문 분야를 제외한) 모든 중요학문의 인식론과 방법론을 점령하고, 월스트리트와 실리콘 밸리까지, 뉴욕과 워싱턴까지 경제와 정치의 담론을 장악했는가 하는 질문은 그 자체로도 흥미있는 문제이다. 그 작업은 전문적 학자에게 맡기기로 하고, 여기서는 현대에 얼마나 그 영향이 광범한가를 정리해 보자.

 내가 다른 글에서 말했지만, 물리학을 중심으로한 현대자연과학 실증적 사회과학의 기본규범은 외부세계가 실재한다는 실재론적 존재론, 사실에 대한 이성적 탐구에 의해 그 사실과 들어맞고 또 유용한 지식을 객관적으로 건설하고 상호소통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인식론, 더 나아가서 객관적 세계에 대한 개념적 수학적 모델을 건설하고 그것을 실험, 관측 데이터와 비교 분석함에 의해서 모델을 테스트하고 더 좋은 모델을 만들어 감으로써 실제와 접근한 객관적지식을 건설해간다는 학문적 방법론이다. 이 물리학의 규범은 모든 근현대적 중요 학문적 업적과 그 업적에 기반한 정치경제사회적 진보의 기반이 되는 철학이요 학문방법론이다.

 그런데 그 철학과 학문방법론의 성과는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라, 오래 걸려서 매우 힘들게 얻어진 생각이다. 그리고 민주주의와 마찬가지로, 올바른 철학도 세대마다 반복해서 힘들게 지켜내지 않으면 무너지게 된다. 물론 서구에서 특히 미국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없어 보이지만, 남한의 경우는 아예 현대과학적 사고가 제대로 자리해본 적이 없고,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이런 과학적세계관을 확산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또 현대적사고에 훈련이 안된, 남한의 일반 대중과 학생들이 복고반동적인 반이성, 반과학, 반실제론적 상대주의자들의 선동에 넘어갈 수 있는 가능성도 미국에 비해 훨씬 많다. 포스트모더니즘 상대주의가 미국과 프랑스에선 길모퉁이 카페의 조잘거림 정도였는데, 남한의 인문학분야에선 마치 광장의 나팔소리처럼 들렸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두 가지 측면에서 과학도님의 물리학옹호론을 응원해 보자. 하나는 물리학의 존재론 인식론, 그리고 학문적 방법론의 규범이 지구촌화 되어가는 세계에서 얼마나 광범하게 지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미국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것이고, 두 번째는 실제로 현대학문이 어떤 측면에서 물리학의 존재론 인식론 및 학문적 방법론을 수입하고 확대 발전시켰는가를 경제학 경영학의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1. 물리학적 규범 (존재론-인식론-방법론) 의 현대지식사회에서의 위상

 우선 물리학적 규범이 얼마나 사회에 광범위하게 지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과학도 님이 말한 최근 금융산업이나 정보기술 산업에서의 물리학자들이 우대받은 현상은 최근의 일과성의 그냥 사건이 아니고, 사실은 매우 깊은 뿌리가 있는 일이다.

 물리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미국사회에서 우대 받는 것은 학부, 석사, 박사 각 단계마다 다 나타난다. 예를들어 미국일류대학의 학부학생들은 물리학(수학) 전공자들을 Physics(Math) Jock 이라 질투섞인 용어로 부른다. 이건 농구선수들을 주로 Jock 이라 부르는 거에서 따온 말이다. 이 Math Jock 들에게 질려서 하바드를 때려치운 사람이 빌 게이츠이고, 아인쉬타인처럼 되고 싶어서 프린스턴에 갔는데 이 Physics Jock 들에게 질려서 좀 더 쉬운(?) 컴퓨터 공학으로 전공을 바꾼 사람이 Amzon.com 을 세운 제프 베이조스이다.

 미국 일류대학학부의 경우는 상당히 명시적으로 학생들 사이에서도 머리 좋으면 수학과 자연과학을하고 그렇지 못하면 순서대로 사회과학 인문학을 하는 것으로 합의(?)가 되어있다. 물론 자연과학자나 공학자가 될 정도의 두뇌가 안되더라도 (예를들면 필자처럼), 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학을 전공한 사람들 중에도 그 중 좀 나은 사람들은 (사람이 낫다는 게 아니라, 순전히 academic potential 의 의미에서) 대학원에선 법학, 경영학, 의학, 행정학 등의 물리학적 규범에 입각한 학문들을 배우며 지식노동훈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다행스럽게도 포스트모던 기버리쉬가지고 고민할 필요가 없다. 물론 법학, 경영학, 의학, 법학, 행정학 대학원 입학 사정에서, 물리학과 출신들은 최고의 대접을 받는다.

 하바드 물리학과에서 맨 C 만 받아도, 하바드 법과대학원에 들어가는 친구를 본 적이 있다.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학부물리학과를 꼴찌졸업했는데, 물리학을 전공했다고 Wharton School 의 MBA 입학사정담당교수가 인터뷰때 내 학부학위명에 동그라미를 치며, 경영학에 꼭 필요한 기초훈련을 했으니 입학하라던 기억이 있다. MIT 는 면접을 안해봐서 모르겠지만, 내 성적으로 합격이 된 것은 물리학전공이었기 때문임에 분명하다. 경제학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학부나 석사를 물리학-기계-전자공학등을 한 사람들이 많이 있고 큰 업적을 내는 사람들이 많다. 예를들어 전후 경제학의 중시조인 MIT 의 폴 새뮤엘슨과, 신경제성장론의 주창자인 스탠포드의 폴 로머 등이 그런 사람들이고, MIT 의 Jian Wang 등 젊은 금융경제교수는 아예 물리학 박사를 마치고 Finance 박사학위를 한 번 더 했다. 물리학과 꼴지 졸업생인 나는 물리학과 졸업을 했다는 이유로 동료경영경제학자들 사이에서 뭔가 기초튼튼한 놈으로 여겨지고 있다. 주위 동료경영학자들도 80 % 이상이 학부에서는 자연과학이나 공학을 공부한 사람들이다. 이런 현상은 물론 기업의 인사담당자들 중역들 사이에서도 잘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에, 수학자나 물리학자를 대거 채용하는 현상은 마이크로 소프트나 골드만 삭스, 살로먼-스미스-바니 등에만 국한되는 현상은 아니다. 미국의 경우 사회각계의 리더들이 물리학적인 규범에 기초한 교육과 사고훈련이, 얼핏보기에는 별관계 없는듯한 경영, 법률, 경제, 사회의 제반문제를 생각하고 풀어내는 데에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잘알고 있기때문이다.

 그럼 물리학적 규범(존재-인식-방법론에)에 바탕을둔 학문과 그 학문을 공부한 사회의 엘리뜨들이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교육되고 어디서 뭘 하는지 한번 살펴보자. 세계의 최고급 지식노동자를 육성하는 산실인 미국대학원교육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세계지식의 수도 캐임브리지에 자리하고 있는 하바드와 MIT 의 예가 좋은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바드, 엠아이티 경영대학원 (1100), 법과대학원 (800), 의과대학원 (800), 행정대학원(150), 자연과학 공학분야 (2000), 경제학과 (80) 에서 이런 실재론 객관적 인식론에 바탕을 둔 교육을 받은 MBA, JD, MD, MS, PhD 들이 일 년에 최저 4-5 천명이 쏟아져 나와서 미국과 세계의 학계, 산업계, 정관계로 진출한다. 인문학분야를 전부 통통 털어야봐 이런 지도적 인물을 키워내는 숫자는 오십명이 될까말까 할것이다. 그 중에서도 대부분은 언어학, 언어철학, 분석철학, 실재론적 객관주의적 역사학 사회학 심리학, 인류학 등 물리학의 규범을 채택하는 학문영역의 사람들이고, 상대주의적 전통속에서 교육받고 대학원을 졸업하는 사람 열 명을 거명할 수 있다면 내가 매우 놀랄 것이다. 그리고 있다해도 그 사람들의 얘기들은, 대부분의 미국의 의사결정자들에게는 뭔소린지 이해가 안가는 말들이기 한마디로 대세와 지장없는 얘기다. 미국에서는 게임은 오래 전에 끝났고, 더 이상 별 논의할 이유가 없다. 물리학의 규범은 학문세계에서만이 아니라, 정치 경제 저널리즘의 현장에서도 확고하고 유일한 규범이다. (내가 잘 모르고, 또 이런 물리학적 규범이 침투하지 않은 곳이 예술 분야다.)

2. 경제학과 경영학의 물리학 규범의 채택과 성장

 이제 학문분야에서 물리학 규범(존재론-인식론-방법론)의 헤게모니를 한번 살펴보자. 화학, 생물학 등의 분야에서야 말할 것도 없을 테니까, 조금 떨어져 있다고 생각되는 경제학, 경영학 분야부터 물리학의 영향, 특히 그 인식론과 방법론의 침투과정을 간단히 살펴보고, 또 과정의 성공으로 성공으로 인해 학문적 정치적 영향력이 얼마나 어떻게 성장했는지를 생각해 보자. 끝에 물리학의 규범을 받아들이면 어떤 장점이 있어서 그렇게 쉽게 강력해질 수 있나 정리해보자.

 경제학에서의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뉴튼이라 부를 수 있는 아담스미스, 리카아도, 맑스의 경제저작의 위대성을 논점과 관련지어 생각해보면; 경제학이 단순히 계급투쟁의 이데올로기적 무기일뿐만 아니라 "과학"이란 것을 믿고, 실천적으로 학문적 업적으로 증거를 보였다는 것일 것이다.. 좀 시간을 뛰어넘어 현대 경제학의 경우는 신고전주의 경제학에서부터 (19세기 말에 시작된 흐름) 물리학의 존재론 인식론만이 아니라, 방법론 까지를 거의그대로 수입한다. 그 방법론이란 경제현상을 접근할 때 기본가정에서 출발한 수학모델을 만들고, 그 모델이 실제 경제 데이터와 맞나보고, 틀리면 고치고, 덜 맞으면 더 맞게 수정하고 이런 중간단계의 방법론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물리학이 What is the First Principle?을 찾아 끊임없이 그 기반을 깊게 하듯이 경제학도 어디서부터 이론의 토대를 세워야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탐구해 나간다.

 예를 들어 물리학이 우리 인간을 포함해서 모든 물질을 구성하는 소립자들을 찾고 그 소립자들의 운동법칙을 찾아내려 하듯이, 경제학은 경제주체의 동기를 제공하는 가장 근본적 원리가 무엇인가에 관심이 있다. 지금까지 경제학자들은 사람들은 경제주체로서의 개인은 쾌락 (utility)을 최대화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단순한 가정에서 출발, 예를 들면 경기변동과 경제위기의 발생원인부터 (거시경제) 산업 조직내부의 인간행동과 (Economics of Organization) 조직들 사이의 경쟁 (Industrial Organization) 행위 등에 대한 설명력이 뛰어나고 유용한 이론을 만들고 경험적으로 테스트하고 있다. 사회현상도 자연현상과 마찬가지로 연구자의 외부에 실재하고, 또 그 사회 현상에 대한 객관적 지식이 이성적 노력으로 수립가능하다는 철학적 믿음에 바탕을 둔 경제학의 성과는 특히 20 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16세기 이후 물리학이 공헌한 이상으로 인류에 공헌을 해오고, 경제학자들은 물리학자들 이상으로 사회적 존경과 대우를 받고 주요 정책결정에 참여하고 있다.

 경제학자들이 자연과학자들과 같은, 간혹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리게 된 것은, 그 학문적 그리고 실천적 성과 때문이다. 많은 경제학 질시자들의 오해와는 전혀 반대로, 현대 경제학은 16 세기 이후 현대물리학의 성과에 버금 갈만큼의 중요한 역할을 20 세기 후반에 해 냈다. 가장 큰 이론적 공헌은 버치님의 관찰대로 미시경제학이지만, 가장 큰 실제적 공헌은 앞의 버치님의 거시경제학에 대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거시경제학이다. 1929 년까지의 초보단계의 경제학적 지식에 기반한 자유방임적 시장경제는 공황, 실업, 노동계급의 엄청난 빈곤으로 얼룩졌다. 생각해 보자. 뉴딜정책의 채택 이후 세계는 지금까지 70 년 동안 큰 공황을 한번도 겪지 않았고, 서구선진국의 경우는 비참한 노동계급의 개념이 완벽히 사라졌고, 세계역사상 가장 빠른 경제성장을 누리고 있다. 서구경제학의 논리를 받아들이거나 그 헤게모니가 강제로 관철된 지역 (일본, 아시아 네 나라 등) 은 비서구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전후 40 여년동안 경제사회개발의 결과 서구의 생활수준에 도달했다.

 이런 성과의 근거는 시장과 국가기구의 경제적역할에 대한 과학적이해에 바탕을 두고 각 나라의 경제정책이 꾸려졌기 때문이고, 세계경제기구들도 그렇게 구성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 IMF, World Bank, OECD 를 필두로한 세계적 경제기구들, 세계적 영향력이 있는 미연방은행과 미재무성 등의 헤게모니를 Academic Economists 들이 잡고 있는 현상은 그래서 우연이 아니라 학문적 성과를 바탕으로 한 정당한 것이다. 물리학자들이 20 세기 중엽의 국가 주도의 과학기술진흥책을 주도해서, 지금의 컴퓨터와 인터넷 위성통신 등의 기술발전의 기초를 놓은 것과 마찬가지로, 현대의 경제학자들은 세계정부구성의 전망하에 기초를 놓고 있다고 보면 된다. 이렇게 경제학자들이 물리학자들을 존경하고 물리학의 규범을 따라 배우려고 하는 것은 물리학의 학문자체와 그 학문적 성과를 바탕으로 한 사회참여가 인류 복지 증진에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모범적으로 수행해왔기 때문인 것이다.

 물리학은 현대 지식사회의 근간이 되는 철학적 규범 (존재론 인식론) 학문적 방법론 (수학적 모델과 사실 검증) 만이 아니라, 특히 20 세기 중반이후에는 구체적인 정책에 참가해서 강한 영향력을 발휘함으로서, 현대 정보기술혁명과 지식기반사회의 철학적, 기술적, 정책적 기초를 놓았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을 스승으로 모신 경제학자들이 그 뒤를 이어서 21 세기 중반에는 분명하게 모습이 들어 날 세계 경제공동체 혹은 세계국가의 기초를 놓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경영학은 잠깐 짧게 정리하자. 15 세기 복식부기의 발명에서부터 원시적으로 탄생된 경영학 분야도, 바로 물리학의 존재 인식론과 방법론에 바탕을 둔 19세기 말 20세기 초 Taylor 의 작업이후에 급속하게 과학기술화의 과정을 겪는다. 테일러의 초기노력은 주로 사상운동으로서의 성과와 실천적 성과였다면, 이십세기 중반이후 이론적 성과가 나타난다. Operation Research 분야, 금융분야가 각각 물리-공학-경제학의 원리들을 바탕으로 20 세기 중반에 학문내용의 과학화 과정을 이루었다. 재미있는 발전은 경영대학내에서 과학적 지식과 논리로 무장하고 강력해진 금융분야와 OR 분야의 학자들의 강력한 학문적 정치적 영향을 받아 1970 년 이후에는 회계학, 마케팅, 전략, 조직, 생산관리, 최근에는 정보기술경영분야 등의 대부분의 경영학 분야들이 차례차례 확고한 물리학 규범의 학문적 위계에 포섭하는 일을 이미 완성했거나 계속하고 있다. 이렇게 경제학과 경영학 분야는 특히 20 세기 후반에 물리학적 규범으로 학문적 엄밀성을 세우고, 그를 바탕으로 사회적 지위를 확대해왔다. 물리학자들이 300 년 걸린 일을, 그 과정을 아주 목적의식적으로 따라한 경제학자들은 100 년 짧게 보면 50 년 만에 해 낸 것이다. 어떻게 왜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3. 물리학적 규범의 장점

 물리학 규범에 따라 학문이 과학화의 과정을 겪으면 현실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매우 강력한 장점이 있다.

 첫째는 누적적인 지식발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매번 사람이 바뀔 때마다 존재론 인식론부터 시작해서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한다는 말까지 처음부터 다시 해야하는 상대주의적 잡설들하고는 달리, 이미 수많은 질문을 올바르게 대답한 튼튼한 학문체계에 바탕을 두고 그 체계가 제시하는 문제, 그 체계가 아직 풀지 못하는 문제, 그 체계내에 상호모순적인 요소등의 문제 등에 여러 사람들이 분업적으로 참여할 수가 있게 된다. 그 결과적 현상은 지루한 것 같지만 십 년만 지나면 정신이 번쩍 들도록 발전하는 학문을 보게 된다.

 둘째는 체계적이고 통일적인 높은 수준의 훈련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서울대가 세계 700 위에도 못 드는 학교임에도 불구하고, 원래 머리가 똘똘한 학생들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웬만한 대학에서 물리학, 화학, 경제학 교육을 제대로 받은 학부나 석사과정 대학원 학생들은 세계 Top 10 의 미국 대학원에 와서 공부하는 데에 전혀 문제가 없다. 물론 인도나 브라질 중국 등 한국보다 더 못한 나라의 대학에서 이런 분야를 공부한 학생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미국 대학의 대학원 교육은 미국 학부출신들의 경쟁장이 아니라, 전세계에서 뽑힌 머리 좋은 놈들의 경쟁장이 될 수가 있고, 가속적 발전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셋째는, 학자사회의 저열한 정치적 전략적 행위동기와 그로 인한 부패, 그리고 다시 그로인한 비효율이 확 줄어들게 된다.

 논리적 정합성이 있고, 사실에 부합하는 이론이 살아남는 체계에서는 경쟁의 공정성이 보장된다. 게임이론을 동원할 것도 없이, 예를 들어 결과 측정이 분명한 100 M 달리기에 심판의 부정이 개입할 가능성이, 연예인 주연 선발과정에서 매춘이나 뇌물이 개입할 가능성이 훨씬 적은 것과 마찬가지다. 학문 세계에 이렇게 (상대적으로) 명확한 기준이 세워지면, 사람들의 재능이 사실과 부합하고 논리적 정합성이 있는 이론을 만들어내고 그 이론을 테스트하려고 객관적 사실을 모으고 실험하는 과정에 주된 노력을 경주하게 된다. 남한의 욕많이 먹는 교수 채용, 승진과정에서도 물리학과와 화학과가 그리고 사회과학에서는 경제학과가 가장 객관적이라는 평을 듣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러한 깨끗한 경쟁의 누적효과는 엄청난 것이다.

 넷째는, 학제간 연결이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내가 MIT 나 NYU 에서 경험한 것으로 내가 좀 놀란 것은, 예를 들어 생산성문제를 연구한다고 했을 때, 기계공학자, 물리학자, 경제학자, 경영학자가 같은 팀에서 존재론-인식론-방법론 따질 필요 없이 주어진 문제를 같이 토론하고 해결하는 것이었다. 만약에 존재론-인식론이 다르다면 이런 학제간 협력은 불가능한 것이다. 자연과학과 공학간에만 아니라 경영학 경제학과 같은 사회과학사이의 협력은 매우 중요한 발전적 의미가 있다.

 한 가지 사례로 내가 가장 많이 드는 것이, 조직이나 국가공동체 세계공동체를 지원하는 정보시스템의 설계 개발 문제이다. 이 얘기는 너무나 길어지기 때문에 조금 작은 문제 예를 들어 기업현장에서 쓰이는 Expert System 이나, AI System 등을 만드는 문제를 예로 들어 보자. 예를들어 의학분야에서 이런 시스템을 개발하려면 컴퓨터전문가, 경영학자, 임상의, 생물학자 등이 고도의 협력을 수행해야한다. 그런데 이들이 모여서 존재론-인식론부터 따지고 있다면, 플라톤부터만 계산하더라도 2300 년동안 고 문제만 따져도 해결안날것이기 때문에, 실제 일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반면에 전원이 물리학적 규범으로 통일되어 있으면, 문제를 정의하고, 커뮤니케이션하고, 분업으로 나눴다가 다시 합치고 하는 일이 훨씬 쉬어진다. 또 다른 예로 요즘 대유행하는 소위 E-Commerce 의 정보시스템들, 특히 경매시스템 등을 제대로 구성하려면 등에는 컴퓨터공학, 시스템공학, 경영경제학자들의 공동협력이 필수적이다.

 다섯째는 Hoax 걱정을 안하는 학문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소칼의 Hoax 사건의 정말 코미디는 Social Text 의 심사위원들이 소칼 논문이 원래는 진짜로 낸 건데 나중에 혹시 생각이 바뀐게 아니냐라고 안타까워하고 의심스러워한 일이다. 그리고 더 웃긴 것은 소칼 사건 이후로 상대주의자들의 저널들에서는 Hoax 걱정이 되어서 제대로 심사를 할 수 없다고 불평하면서 소칼 Hoax 행동의 도덕적 문제를 지적한 일이다. 소칼사건을 통해 미국의 학부학생들에게 까지도, 소위 포스트모던 상대주의자들이 조롱거리가 된 것은 단순히 Hoax 에 걸렸다는 것 만 아니라, 그것을 변명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학문적 기본소양부족을 여지없이 과시했기 때문이다. 학술지 심사위원들에게 들어오는 논문이 Hoax 인지 아닌지를 구별못해 전전긍긍하게 하는 학문이 어떻게 심각한 학문이 되나.

 학술지의 심사과정이란 (Peer Review) 것이 원래, 잘된 논문과 덜 잘된 논문을 골라서 주로 잘된 논문을 출판하자는 것인데, 아예 장난으로 한번 써본 글과 심각한 논문을 구별 못해 전전긍긍한다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장난으로 쓴 글과 심각한 논문을 구별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사람들이 모여 떠드는 분야가 어떻게 현대적 학문인가 말이다. 수준 이하의 심사만이 아니라, 이런 수준이하의 변명들이 사실 미국 학계에서 포스트모던 상대주의자들의 현주소를 만방에 과시하는 최고의 블랙 코미디였다.

 물리학이나 경제학은 전혀 외부자의 Hoax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첫째는 소칼은 아마추어적 장난으로 상대주의자들의 leading trendy 학술지에 글을 실을 수 있는 반면, 때려 죽여도 데리다나 라깡이 Journal of Economic Theory 에 Hoax 논문을 실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백 만분의 하나 확률로 혹시 그런 논문이 실었다고 해도 전혀 문제가 될 수 없다는 점이다. 그 이론이 정합성이 있고, 사실과 부합하고, 독창적이라면 라깡과 데리다가 야 그거 Hoax 야 라고 주장해도 아무런 효과가 없이, 경제학 물리학에의 공헌이 된다. 왜냐하면 경제학이나 물리학에서는 누가 썼느냐 그 사람이 전에 나중에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주관적 잡소리들은 논문의 공헌을 결정하는 기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객관적 사실과 이론의 정합성만이 문제가 된다.